본문 바로가기
미술 연구소/서양 미술

화가이야기 - '에두아르 마네'와 모네의 우정

by 지식 연구원 2022. 9. 21.
반응형

  모네의 작품을 소개하던 중 마네와 모네를 헷갈려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저 또한 학창 시절 마네와 모네의 이름이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해서 <마네모네> 한쌍으로 기억했었습니다.아마도 같은 시대 인물이고, 그 둘의 우정이 돈독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마네는 모네보다 8살이 많지만, 모두 동시대를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입니다. 지난번 모네에 이어, 마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마네의 &#39;피리 부는 소년&#39;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작업 중

 

 

금수저 마네의 일생

  '에두아르 마네'는 파리 출생으로 법관의 아들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화가의 길을 걷기로 하면서 자신을 위해 준비한 미래를 포기했습니다. (반면, 모네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변호사 밑에서 일을 하며 홀로 역경을 헤쳐나가며 화가가 되었습니다.)  마네는 아버지가 화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17세에 선원 수습생이 되었습니다. 

 

1850년 남아메리카 항해를 끝내고 쿠튀르의 아틀리에로 들어갔으나 고전풍의 스승에게 반발한 마네는 자유연구로 나아가 화실을 차립니다.  '버찌를 든 소년'은 그의 본격적인 첫 작품이었는데,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그림 모델인 소년이 마네의 화실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게 됩니다. 큰 충격을 받은 마네는 새 화실로 이사를 합니다. 

 

1861년 살롱에 입선하여 수상하였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낙선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낙선전에 전시된 '풀밭 위의 점심'과 입선작 '올랭피아'로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되었습니다. 두 작품의 비난은 오히려 일부에서 열렬한 지지자를 얻었고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등 청년 화가들 사이에서 인상주의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네 본인은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하지 않고, 그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매우 높았지만,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다가 51세에 파리에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마네'와 '모네'의 특별한 우정

  가난한 집안의 아들 모네는 마네를 존경해서 마네의 그림을 모작을 많이 했습니다. 반면 마네는 일찍 국전에 입선하여 작품을 비싸게 팔 수 있었으며 금수저답게 맞춤 양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1966년 모네는 <녹색 옷을 입은 여인, 카미유>로 살롱전에서 호평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마네의 그림으로 착각하여 마네에게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마네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자신의 작품으로 착각하는 관객들에게 불쾌감을 표했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모네는 너무나 높은 존재였던 마네에게 감히 사과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둘은 다음 해, 다시 한번 만나게 됩니다. 모베르가의 화랑에서 마네는 모네 앞에서 그의 그림을 비꼬아 평가합니다. 이때 서먹한 관계는 3년이 지나 둘이 정식으로 인사하고 서로가 마음이 통하는 친구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두 사람은 전통적인 미술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에 성공하려면 파리 살롱전에서 인정받아야 했습니다. 마네와 모네의 그림은 공통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많이 있습니다.

 

첫째로 관심의 대상이 달랐습니다. 마네의 관심사는 파리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인 반면, 모네는 산과, 바다, 들판 등 주로 자연이 소재였습니다. 

둘째로 빛에 대한 관심 정도가 달랐습니다. 마네는 순간의 빛의 상태를 반영하는 정도라 같은 대상을 여러 번 그리지 않은 반면, 모네는 빛에 대한 인상을 시간에 따라 반영하여 같은 대상의 그림을 여러 점 그렸습니다. 

셋째로 그림을 그리는 색이 다릅니다. 마네는 검은색을 즐겨 썼으며, 모네는 빛의 화가로 불리는 대표적인 화가로 검은색을 거의 쓰지 않고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표현합니다.

 

마네는 모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고, 모네는 마네를 정신적인 지주로 따르게 됩니다. 

1865년 모네가 국전에 입선하면서 마네의 작품이 함께 소개되기 시작하고 관중과, 평론가들은 두 사람을 한쌍으로 언급하게 됩니다. 마네가 죽은 후, 모네는 지인들과 '올랭피아'를 구입해 마네의 위대한 작품이 해외에 팔리지 않도록 루브르에 기증하는 운동을 벌입니다. 이것은 마네에 대한 존경이자, 마네에게 받았던 도움을 갚게 되는 것입니다.

 

올랭피아는 화가 정신과 스승인 마네의 위대한 승리의 기록입니다.

- 장관에게 보내는 모네의 편지 중 - 



마네의 대표 작품 

피리 부는 소년

개인적으로 마네의 작품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피리 부는 소년>은 배경을 없애고 여백을 어두운 색으로 칠해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벨라스케스의 영향과, 단순한 구성이 오히려 주제를 힘 있게 해 준다는 일본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작품입니다. 배경을 회색빛으로 칠해 소년의 모습이 두각 되고, 바지의 외곽선을 강조함으로써 다리를 더욱 튼튼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외곽선의 붓칠은 서예처럼 보이는데, 그는 동양의 서예로부터 일격의 붓놀림으로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누가 뭐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올해의 낙선작 '피리 부는 소년'이다."

- 에밀 졸라 -

 

올랭피아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떠올리게 하는 <올랭피아>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여주인공은 창녀입니다. 벌거벗은 사람을 매우 자극적으로 그린 사람은 마네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흑인 메이드는 당시 아프리카 사람들을 시종으로 부리던 부르주아들의 위선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검은 고양이는 여성의 음부, 성교를 의미합니다. 게다가 여신도 아닌, 창녀가 뻔뻔하게 관람자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요란한 화제를 몰고 왔습니다. 그는 올랭피아를 통해 겉은 화려하지만 퇴폐적인 파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미술 학습 적용 -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따라 하기

학생들과 마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여전히 마네와 모네는 헷갈리지만, 그 둘의 차이점은 확실히 알았습니다.

관심 대상이 다르다는 점, 빛에 대한 관심 정도의 차이, 주로 쓰는 색상의 차이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리 부는 소년'을 따라 그려보았습니다. 강렬한 획과 색감을 최대한 따라 해 보려 노력했습니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배경의 회색빛과 소년의 붉은 바지를 최대한 비슷하게 표현하려고 수차례 연구를 했습니다.

(참고로 이번 수업은 고학년 수업입니다.) 모작도 이렇게 어려운데, 마네 역시 많은 고민을 하고 그렸을 거라 생각됩니다.

따라 할 수 없는 일격의 붓놀림에 찬사를 보냅니다. '존경합니다. 마네.'

 

 

-참고문헌 : 아티스트 인사이트 <차이를 만드는 힘>

반응형

댓글